부수고 싶은 마음 알아차리고 참아보기

 

초임 때, 2학년 담임이었다. 아이들과의 시간이 거의 마무리되던 겨울, 하루는 눈이 펑펑 내렸다. 반가운 마음에 반 아이들과 함께 운동장으로 나갔고 커다란 눈사람을 함께 만들었다. 반 아이들과 함께 만들다 보니 크고 훌륭한 눈사람이 완성됐고 반 아이들과 함께 기뻐하면서 사진도 찍었었다. 그리고 교실로 돌아갔는데... 잠시 뒤, 창밖을 내다보니 몇 학생이 발로 치고 빗자루로 때리며 눈사람을 박살 내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본 반 아이들은 몹시 슬퍼했고, 난 그 학생들에게 가서 눈사람을 파괴한 이유를 물어보자 '그냥'이란 말이 돌아왔었다. 그리고 평범한 모습의 아이들이었다. 

 

내가 근무하고 있던 곳은 천주교를 기반으로 운영되는 곳이었고, 학생들에게 선한 여러 활동을 진행하고 있는 환경이었는데도 그냥 눈사람을 부수면서 낄낄대던 그 모습이 내겐 충격이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선한 모습으로 출발해 나중에 악한 모습으로 성장하는 쪽보다는 원래 악한 모습으로 태어나 조금씩 다듬어져 선한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오랫동안 교사로 학생들을 관찰하다 보니 쉽게 부수고 파괴하는 모습이 일상 속에서 자주 보였다. 애써 만든 것을 한 방에 박살내거나 활동을 끝낸다는 말에 온갖 것을 찢고 부수는 모습이 갑작스럽게 튀어나오곤 했다. 부수고 싶다 부수고 싶다... 이런 마음이 아이들에게 있음을 인정하게 됐고, 이젠 그 마음을 조절할 수 있는 쪽에 도움을 주는 것이 낫겠단 생각이 들었다. 

 

 

 

마침 동아리 활동 시간이 왔길래 이런 마음을 돌아볼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을 운영해야겠단 생각을 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미리 준비했던 종이컵 2,000개 정도를 주고 쌓아보도록 했다. 어떤 방식으로 쌓으면 좋을까? 높게 쌓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서로 역할을 어떻게 나눠볼래? 등 여러 말을 통해 15분 동안 쌓아 올려보도록 했다. 그리고 난 반 아이들을 관찰했다.  

 

 

쌓다가 무너지면 탓하는 아이들이 있거나 크게 소리 지르는 아이들도 있었다. 무엇보다 어느 정도 높게 올라가자 바로 "발로 차서 무너뜨려 보고 싶다." "손으로 때려 부숴보고 싶다." 등의 말과 함께 동작이 몇 명의 아이들에게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우선 그 모든 것을 그냥 바라보면서 종이컵 쌓기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상황과 말과 행동을 관찰했다.  

 

다 쌓은 뒤, 기념사진을 찍고 나서 한 명씩 물어봤다. "이제 활동 마무리하고 싶은데 뭘 하고 싶니?" 그러자 몇 명은 "더 쌓아 올려보고 싶어요."라고 답을 했지만 많은 아이가 "발로 차보고 싶어요." "무너뜨려 보고 싶어요." "이곳에 뭔가 던져보고 싶어요."라고 답을 했다.  

 

그래서 '난 너희 입장에서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라고 말하고 나서...

 

"같은 종이컵을 주고, 같은 시간을 줬는데 이걸 대하던 것이 각자 다르더구나. 종이컵이 무너질 때 '괜찮아', '할 수 있어.' , '다시 쌓아 올려보자.'라고 말하던 학생도 있었지만, 소리를 지르거나 '너 때문이야!'라고 탓하던 학생도 있더구나. 이건 무슨 차이일까? 선생님은 삶을 살아가는 방식, 패턴이라고 생각해. 어쩌면 이런 경쟁이 있고 약간의 압박이 있는 순간 사용했던 말과 행동은 너희 관계와 살아가는 여러 장소에서 비슷하게 나올 거라 생각해." 

 

"무엇보다 선생님은 너희가 애써 쌓아 올린 이 멋진 작품을 '부수고 싶다', '발로 차고 싶다', '뭔가 던지고 싶다.'는 말에 놀랐단다. 정말 공들여 만들었지 않니? 이것도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아닐까? 아까워하기보다 파괴하면서 순간 내게 생길 잠깐의 호기심 충족과 즐거움을 더 크게 생각하고 있더구나. 하지만 더 쌓아 올려 보고 싶어 하고 조금 더 높게 쌓아보고 싶다는 답을 하던 학생이 있어서 선생님은 감동이었단다. 그래 삶을 그렇게 바라보면 참 좋겠구나." 

 

그리고 난 과거의 눈사람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이젠 정리할 텐데 과격하게 부수기보단 차분히 정리해보고 부수고 파괴하고 싶은 그런 마음을 이번엔 다스려보고 다독여보자고 했다. 할 수 있다면서.. ^^ 

 

 

그러자 정말 아름답고 그림 같은 장면이 펼쳐졌다. 서로 탓하지 않고 차분하게 종이컵을 모아 상자에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아름답다고 이야기하고, 세상을 살면서 파괴하고 부수고 싶다는 마음과 말보다는 '더 해보고 싶고' '아쉬워요'라는 말을 더 사용해보면서 살자고 이야기했다. 이 활동에 참여한 아이들은 이런 소감을 남겼다.

 

*부숴버리고 싶었던 내 마음을 잡아봤고, 내 마음을 제어해 봐서 좋은 시간이었다. (ㅅㅈ) 
*탑을 쌓으면서 재미있었지만 부숴보고 싶었다. 하지만 더 만들어 보고 싶다는 마음을 가져보겠다. (ㅎㅈ) 
*내가 부수고 싶은 마음만 가지고 열심히 만들었던 작품을 부숴버리는 것보다 내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알게 됐다. (ㅁㅅ) 
*종이컵 탑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부수고 싶은 마음이 더 생겼다. 내가 이런 마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는 것에 나중에 깜짝 놀랐다. (ㅎㅎ) 
*처음으로 부수지 않고 정리해 뿌듯하다. (ㅁㄱ) 
*종이컵을 쌓고 발로 차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내 마음을 다독여볼 수 있었다. 탑 쌓는 건 너무 재미있었다. (ㅈㅇ)

 

함께 활동했던 아이들이 세상을 살면서 뭔가 부수기 전에 멈칫거림이 한 번이라도 생긴다면, 무심코 했던 공든 작품 무너뜨리기를 조금 줄일 수 있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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